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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요동치는 이슬람 세계

by 김나나씨 2022. 4. 12.

아바스 왕조의 분열과 함께 하나의 왕조가 넓은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페르시아인과 튀르크인 등 다양한 외부 세력이 어우러져 이슬람 세계를 이끌어 가게 됩니다. 이와 함께 이슬람의 문화도 발전하며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1. 아바스 왕조의 분열

아바스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의 후우마이야 왕조, 이집트에 파티마 왕조, 수도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이렇게 크게 세 개로 분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칼리프에 대항하는 반란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된 총독과 토착 세력 호족이 해결사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란을 진압해주는 대가로 자치권을 얻었는데, 사실상 칼리프에게서 독립을 이루어 나라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900년대 들어 이슬람 세계는 함단 왕조(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지역), 부이 왕조(이란 고원 인근), 사만 왕조(중앙아시아 쪽)가 들어섰다. 그 중 바그다드 주변을 장악한 부이 왕조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믿었다. 이곳에 있던 칼리프는 수니파였기에 부이 왕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사실상 부이 왕조의 포로 신세였다. 그러나 부이 왕조는 이슬람의 다수였던 수니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칼리프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2. 튀르크 인이 세운 가즈나 왕조(977년 ~ 1186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교가 대세이다 보니 유목 생활을 하던 튀르크 인도 자연스레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튀르크 인들은 뛰어난 전사들이어서 서아시아에서 용병으로 활약을 펼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튀르크 인들이 싸움을 잘하자 아바스 왕조에서 독립을 이루었던 지방 세력들도 튀르크 용병을 고용해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962년 중앙아시아의 사만 왕조가 고용한 튀르크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가즈나 왕조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가즈나 왕조는 근처에 있는 인도 펀자브 지방을 계속 약탈하고 침략하여 사람을 죽이고 금은보화를 빼았았습니다. 인도에서 빼앗은 돈으로 수도 가즈니를 꾸미고 문화 부흥에도 힘썼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신화와 전설을 모은 <샤나메>라는 대서사시도 이때 완성되었다.

가즈나 왕조는 사만 왕조 대신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다른 튀르크인들도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서아시아로 오기 시작하면서 대대적인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3. 셀주크의 등장

카스피해 북쪽에 살던 셀주크라는 튀르크 부족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소그디아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1040년이 되자  셀주크는 가즈나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중앙 아시아의 최강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셀주크 부족은 수니파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바그다드 주변을 장악했던 부이 왕조의 포로 신세로 전락했던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셀주크 부족장에게 사람을 보내 바그다드로 와서 부이 왕조를 몰아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요청이었지만 칼리프의 구원 요청은 바그다드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1055년 셀주크족은 칼리프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바그다드로 쳐들어가서 부이 가문을 몰아내고 말았습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수니파)는 자신을 구해준 셀주크의 부족장 토그릴 벡에게 '술탄'이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칼리프는 종교적인 권위를 갖고 실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적 권력은 술탄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칼리프의 지지를 등에 업은 셀주크는 서아시아 수니파 이슬람교의 마음을 얻어 모든 이슬람 세계를 다스리는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셀주크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잘 몰라서 페르시아인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인들이 정치를 맡고 튀르크인은 전쟁을 맡아 역할이 분리되었습니다.

서아시아가 유목 생활을 하기에 날씨가 좋지 않아 중앙아시아에서 온 튀르크인들은 유목하기 적당한 땅을 찾았다녔고 결국 발견한 곳이 아나톨리아 반도였습니다. 튀르크 인들은 이곳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교인들을 약탈하고 땅을 차지해버렸습니다. 그러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7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왔습니다. 튀르크인과 비잔티움 황제는 만지케르트 계곡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튀르크인 유목민은 치고 빠지기 전술로 펼쳤습니다. 결국 7만 명을 끌고 온 비잔티움 황제를 2만 명의 셀주크 군대가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077년 튀르크 인들은 룸 셀주크라는 별도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비잔티움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20여 년 후 서유럽에서 기사들이 와서 이슬람 세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4. 서유럽의 기사들과 전쟁한 아이유브 왕조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왕위를 둘러싸고 다툼이 벌어지게 된 셀주크는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부 문제로 인해 셀주크는 싸울 준비는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로 서유럽의 기사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서유럽의 기사들은 그리스도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었고, 동부 지중해의 큰 도시들을 차지하여 그곳에 네 개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셀주크 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7만 명을 죽이는 등 잔혹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50년 후, 장기라는 튀르크 장군이 에데사라는 도시를 탈환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을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후 살라딘이 나타나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정복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습니다. 아이유브 왕조는 시리아까지 손에 넣고, 아이유브의 술탄 살라딘은 분열된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 최강국으로 떠올라 예루살렘 왕국에 맞서게 되었습니다. 1187년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하여 결국 예루살렘을 되찾았고, 서유럽의 기사들이 예전에 행했던 행동과는 다르게 몸값만 받고 포로들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5. 몽골 제국의 침입을 막은 맘루크 왕조

1219년 몽골군이 처음 서아시아 원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서쪽의 아이유브 왕조는 서유럽 기사들과 전쟁 중이었고, 동쪽의 이란고원과 중앙아시아 일대는 셀주크의 내분이 정리되고 큰 나라들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셀주크에서 독립한 지 100년쯤 된 호레즘이라는 나라가 급속히 세력을 불리고 있었습니다.

몽골군은 강력했던 호레즘이라는 나라를 알아보기 위해 일단 평화롭게 무역을 하자고 몽골 상인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호레즘은 그들의 숨은 속뜻을 알아채고 찾아온 몽골 상인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칭키즈 칸은 다시 한번 사신을 보내 호레즘에게 항의했지만 호레즘은 다시 보낸 사신들의 수염을 잘라 모욕을 주고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몽골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호레즘을 쳐부수기 위해 당장 쳐들어갔습니다. 결국 몽골의 보복으로 인해 호레즘은 수십만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몽골군은 이것을 계기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러시아 초원까지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1255년 몽골군은 본격적으로 바그다드와 이집트를 목표로 서아시아의 이슬람 정복에 나섰습다. 원정군은 바그다드를 포위하고 함락시켰고, 칼리프를 처형하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몽골군에 의해 바그다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몽골군은 이집트로 향했습니다. 당시 이집트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이집트에는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었던 바이바르스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왕조의 다섯 번째 술탄입니다.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도 튀르크 노예들을 사서 맘루크 병사로 썼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자 맘루크 출신의 군인들의 권력이 커지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1250년,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이 죽고 그 아내와 재혼한 맘루크 대장이 이집트를 공동 통치했는데 그게 바로 맘루크 왕조입니다.

1260년 맘루크 군대와 몽골군이 아인 잘루트 평원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아인 잘루트 전투에 참여한 맘루크들은 튀르크, 체르케스계 출신으로 뛰어난 기병일 뿐만 아니라 몽골의 전술에도 친숙하여 이슬람 세력이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 이후 몽골은 러시아 초원에 세워진 주치 울루스와 대립하느라 더 이상 시리아와 이집트에 손을 뻗지 못하였습니다. 바이바르스는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생존자를 이집트로 모셔와 새로운 칼리프로 세우고 이슬람 세계를 부활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