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통일한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택하고 세계 제일의 상업국가로 성장해나갔습니다. 황제 휘종이 북방 이민족과의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여 송나라는 금나라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결국 송나라는 남쪽으로 도주하여 남송으로 명맥을 유지해나가다 몽골의 침입으로 결국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1. 5대 10국 시대(907년 ~ 960년)와 송나라의 중국 통일
당나라가 절도사 주천충에 의해 멸망하고, 주전충은 후량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절도사가 나라를 세우니 다른 절도사들도 여기저기 나라를 세워 중국은 5대 10국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5개의 왕조와 주변에 세워진 10개의 나라가 60년간 지속되었으나 후주의 조광윤이 이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하여 송나라를 세웠습니다.
2. 송나라의 문치주의
절도사 출신 조광윤은 왕이 되려는 마음이 없었으나 그의 부하들이 억지로 왕위에 세웠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군사들을 거느린 그의 부하들이 그들의 군사들로 딴마음을 품을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재물을 주고 절도사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관보다는 문관들을 임명하고, 절도사의 관할 구역을 줄여나가 절도사를 견제하였습니다. 또한 조광윤은 황제 직속 부대인 금군을 대폭 강화하여 황제 바로 밑에 있는 문관의 힘을 계속 키워나갔습니다.
조광윤은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천민 출신만 아니면 누구든지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뽑아준 관리에게 충성하는 습관이 있다는 알고, 황제는 과거시험의 최종 단계를 감독하는 시험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관리들을 뽑아 관리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충성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관리가 되면 봉급을 넉넉히 주었기에 너도나도 관리가 되려고 유학 공부에 매달렸고, 그당시 이런 사람들을 사대부라고 하였습니다. 과거제도를 통해 관리에 오른 사람들을 우대해주었기에 사대부들은 나라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하였고, 타고난 신분으로 여지껏 자리를 보장받았던 귀족들은 점차 몰락하였습니다.
이렇게 문관 등용에 힘쓰는 문치주의를 선택하다보니 아무래도 송나라는 군사력이 약해질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이민족이 자주 송나라로 쳐들어왔고, 송나라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엄청난 양의 재물(세폐)을 바쳐야 했습니다.
3. 상업국가 송나라
수도 카이펑에서는 나라에 세금만 내면 상인들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카이펑에는 전국의 물건들이 모여들었고, 그중에서 강남에서 생산된 쌀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강남의 쌀이 전국으로 팔려 나가며 시장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시장은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상업의 발달로 거래가 늘자 동전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송나라는 바다를 통한 국제무역도 활발히 이루어져 언제나 외국 상인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그래서 송나라는 주요 항구마다 시박사라는 관청을 설치해 많은 세금을 거두었고 상업은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상업의 발달을 통해 사람들이 살기 좋아지니 보다 여유가 생겼고 오락거리와 서민 문학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4. 창고가 비어 가는 송나라와 왕안석의 개혁
송나라는 100년 정도 지나자, 나라는 돈을 많이 벌었지만 군사비와 관리들의 봉급이 날로 늘어 창고가 점차 비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송나라는 흉년이 들 때마다 떠도는 백성들을 병사로 채용해 그들에게 먹고 살아갈 수 있게 길을 마련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백성들이 점차 많아지니 군사비는 점차적으로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병사가 많아지면 나라의 군사력이 강해져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송나라의 문치주의 정책 때문에 무관의 능력 발휘가 되지 않아 병사의 수는 많아도 군사력은 약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를 많이 뽑다 보니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봉급이 많아지자 나라 재정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왕안석은 신종 황제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습니다. 황무지 개간 사업, 균수법, 백성들에게 낮은 이자로 곡식과 돈을 빌려주는 정책 등등 많은 개혁 정책(신법)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구법당이라고 불리는 반대파의 반발이 심해 결왕안석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새 황제에 오른 송나라의 제8대 황제 휘종은 예술에 심취하여 사치를 부리고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글과 그림에 뛰어났고 골동품에도 안목이 깊어 전국의 관리들에게 진귀한 동식물을 수집해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들은 백성들을 닦달하였고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은 결국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휘종은 북방 이민족과의 평화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5. 이민족의 침략
송나라를 괴롭힌 이민족은 거란의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 서하였습니다.
거란의 부족장이었던 아율아보기가 랴오허강 상류에 살던 거란을 통일하고 요나라 황제가 되었습니다. 요나라는 몽골 초원을 차지하고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까지 점령하며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1004년, 요나라는 전연에서 싸움을 계속하다 송나라와 평화 조약을 맺기로 했습니다. 평화 조약의 내용은 송나라가 요나라에 세폐를 보내는 대신, 요나라는 송나라 황제를 형님으로 모시는 조건이었습니다.(전연의 맹)
서하와의 싸움에서도 송나라는 세폐를 보내고 송나라를 황제국으로 받드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6. 남송시대 시작과 멸망
1100년대 만주에서 여진족이 등장하며 금나라를 세웠습니다. 요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송나라와 금나라는 함께 요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송은 강남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바빠 요나라를 거의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금나라는 혼자 힘으로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금나라는 화가 나서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으로 쳐들어가서 황제, 황족, 고위 관료 등 3천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황제의 동생이 강남으로 도망쳐 지금의 항저우를 수도로 삼아 임안이라 부르고 송나라를 이어갔습니다. 이때부터 송나라를 남송이라고 한다. 그리고 금나라와 평화 조약을 맺어 해마다 세폐를 바치고 신하의 예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유목민인 몽골이 새롭게 등장하여 1234년 금나라를 무너뜨리고 남송을 공격해왔다. 1279년 남송은 결국 적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