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말, 유럽의 크리스트교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십자군 전쟁을 벌였습니다. 전쟁은 200년이나 지속되었고, 200년 동안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침략과 약탈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으면 십자군 전쟁은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하여 십자군 전쟁은 시작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크리스트교가 동서로 분리(1054년)
392년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에 세워진 유럽 나라들도 크리스트교를 나라의 종교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1000년쯤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크리스트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크리스트교는 로마의 교황을 지도자로 따르는 로마 가톨릭으로 발전하였고,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교황이 아닌 비잔티움의 황제를 교회의 우두머리로 따르는 그리스 정교를 만들어졌습니다.
2. 셀주크 튀르크, 바그다드를 점령(1055년)
638년 비잔티움 동쪽의 이슬람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던 예루살렘을 차지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크리스트교도들이 로마 시대부터 순례 여행을 떠나던 성지였고, 이슬람 제국은 크리스트교의 예루살렘 방문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1040년 유목 민족 셀주크 튀르크가 중앙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르면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당시 바그다드에 포로 신세로 전락했던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셀주크 부족장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1055년 셀주크족은 칼리프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바그다드로 쳐들어가서 부이 가문을 몰아내고 정치적 권력은 셀주크의 부족장에게 넘어갔습니다.
3.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셀주크 튀르크는 자신들의 민족이 살만한 땅을 알아보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그 곳에서 살던 크리스트교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셀주크와 비잔티 제국은 싸움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결국 셀주크의 승리로 끝났고 비잔틴의 명예는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셀주크는 소아시아 전체를 장악하였고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셀주크는 비잔틴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크리스트교도의 예루살렘 방문을 금지하고 순례자들을 공격하였습니다.
3.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출정(1096년)
셀주크 튀르크가 쳐들어와서 패하고 궁지에 몰리자,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의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번 기회로 비잔티움 황제를 자기 발아래 두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우두머리 자리를 확고히 하려는 속셈으로 십자군을 보내게 됩니다.
제1차 십자군들은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비롯한 동부 지중해 일대를 정복하고, 그곳에 네개의 크리스트교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셀주크 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7만 명을 죽이는 등 잔혹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그 왕국은 40년가량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유럽에서 다시 2차 십자군을 보냈지만 실패했고 제2차 십자군은 빈손으로 철수했습니다.
4. 살라딘,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되찾아감(1187년)
이슬람에 살라딘이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나뉘어 있던 이슬람 왕국을 통합하고 크리스트교 왕국들을 차례로 무너뜨렸습니다.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살라딘에게 성문을 열 테니 살려 보내달라고 도리어 협박하여, 이슬람 군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되찾았습니다.
5. 제3차 십자군 전쟁(1189년~1192년)
3차 십자군을 이끈 사람은 영국의 리처드1세 왕이었습니다. 리처드와 살라딘은 막상막하로 1년을 싸우다가 평화협정을 맺기로 하였습니다.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땅으로 인정하고, 대신 살라드는 크리스트교도가 예루살렘을 자유롭게 방문하도록 하였습니다.
6. 제4차 십자군,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1204)
교황의 목표를 변경하여 예루살렘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군대의 물자 보급을 끊어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제4차 십자군을 이집트로 보내 그곳을 우선 점령하기로 하였습니다. 십자군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상인이 마련한 배를 이용해 이집트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십자군의 인원이 생각보다 적어 베네치아 상인들은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게 된 베네치아 상인들은 뱃삯으로 아드리아해의 자라란 곳을 공격해달라고 요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군은 그들의 말대로 해주었습니다.
황위 다툼으로 쫓겨난 비잔티움의 왕자가 십자군에게 손을 내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황제의 자리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의 왕자에게 약속한 보상금은 받지 못하게 되자 분노한 십자군과 베네치아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였습니다.
7. 십자군 전쟁의 종료(1291년)
콘스탄티노플 공격 소식을 들은 교황은 처음에는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교황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콘스탄티노플 공격으로 인해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던 비잔티움 제국과 동방교회가 힘을 잃게 만들어주었으니 화낼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약탈한 십자군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이후로도 네 차례나 더 벌어졌지만 계속 실패하였습니다. 200년쯤 지나서 아무런 성과없이 십자군 전쟁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8. 전쟁 이후의 유럽사회 변화
지중해를 통해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던 상인들이 돌아올 때는 아시아의 진귀한 물건을 들여와 큰돈을 벌었고 이탈리아 항구 도시들은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무역이 활발해지자 유럽 곳곳에 교역을 위한 상업도시들이 생기고 물건을 만드는 수공업자들도 바빠졌습니다. 옛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이슬람의 숫자와 수학, 중국의 화약과 종이 만드는 기술 등 동쪽 세계의 앞선 문화가 유럽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