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했지만 40년도 되지 않아 멸망하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당나라가 세워졌고 당 태종은 정복 전쟁을 펼치며 세계 제국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당나라는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성장과정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1. 한나라가 무너짐(220년)
호족들의 반란으로 한나라가 무너지고 중국은 호족들이 세운 여러 나라로 쪼개졌습니다.
2. 수나라가 세워짐(581년)
북주 관리였던 양견이 수나라의 첫 황제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호구 조사를 통해 세금을 늘리고, 귀족들의 힘을 누르고 인재를 얻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하였습니다.
문제의 아들 양제는 남북을 잇는 대운하를 만들어 양쯔강, 화이허 강, 황허 강을 물길로 이었습니다. 1500킬로미터가 넘는 대운하 공사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사치스러운 순행(황제가 전국을 직접 돌아보는 것)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세 차례나 패하자 결국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다. 200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황궁을 불태웠고 양제는 살해되었습니다. 수나라는 결국 40년도 안되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3. 당나라가 세워짐(618년)
수 양제의 이종사촌인 이연은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차지하고 당나라를 세웠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 이세민은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두번째 황제 당 태종이 되었습니다. 당 태종은 돌궐 제국을 제압하고 당나라 영토를 넓혀갔습니다. 도호부 제도와 혼인 정책으로 정복한 민족을 다스렸고, 율령반포로 법과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3성 6부제로 체계적인 행정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토지를 나누어주고 토지에서 수확한 곡식의 일부를 세금으로 내는 조용조 제도와 부병제에 따르는 군역 의무를 부과하였습니다.
당나라의 통치 제도와 문화는 동아시아 곳곳에 전파되어 동아시아 나라들이 하나의 비슷한 문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즉,
동아시아 문화권을 만들었습니다.(한자, 유교, 불교, 율령 등)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인구 100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국제도시여서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에서 건너온 상인들이 모여 무역을 하였고 점포수가 4,000개가 넘었습니다.
4. 당나라의 쇠퇴
땅을 받은 백성은 70세가 넘거나 사망하면 땅을 나라에 돌려줘야했지만 잘 돌려주지 않았고, 나라도 제대로 운영하기보다는 세금 걷는 것에만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나중에 땅을 받지 못했는데 세금을 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농민들은 세금을 피해 부랑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균전제가 무너지자 자연스레 부병제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병제가 흔들리자 군사력이 약화되어 절도사라는 관직을 만들어서 모병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절도사의 세력이 커지자 안녹산이란 장수는 세군데의 절도사를 겸하면서 당나라 군대의 40퍼센트의 병사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양귀비에 빠진 현종은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자신은 노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양국충이 안녹산을 모함하자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현종은 반란을 피해 남쪽지역으로 피난을 갔고 안녹산은 장안을 차지했습니다. 안녹산의 반란을 8여년만에 진압했지만 당나라는 이미 쇠퇴의 길을 겪고 있었습니다.
5. 당나라의 멸망(907년)
안녹산의 난 이전에 절도사는 10명뿐이었지만 이제는 40-50명의 절도사가 생겨났습니다. 불안해진 황제는 환관에게 의지해 절도사를 감시하려했고 이로 인해 황제는 오히려 환관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습니다.
세금제도를 조용조에서 양세법으로 바꾸어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소금 전매 제도를 실시하여 소금을 비싼 가격에 팔자 소금을 빼돌려 파는 밀매업자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절도사가 병사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 병사들이 들고 일어났고, 가난한 농민과 소금 밀매업자도 덩달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875년 황소라는 소금 밀매업자가 평등을 내세워 장안까지 밀고 들어가는 황소의 난을 일으켰지만 절도사들이 물리쳤습니다. 결국 주전충이라는 절도사가 황제를 몰아내고 당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